자유게시판
심심해서 쓰는 서울 밖 이야기.
안녕...
또 오랫만에 글 쓰네...
오늘은 어디에 대해 쓸까 생각하다가...
사람들에게 물어봐. 우리나라에서 어느 동네가 가장 재미없냐고.
그러면 다들 자기 동네가 가장 재미없고 볼꺼없다고 할꺼야.
그 중에서 유별나게 재미없다고 하는 곳이 대전이랑 청주인거 같아.
대전이 고향인 친구는 한밭구장에서 야구보고 이성당갔다가 기차태워 보내면 끝이라고 하니까.
청주는 그보다 못해서 청주에 간다고 하면 오지말라고 하지.
그래서 오늘 써 볼 곳은 청주야.
청주가 어딨냐면.....대충 대전 위에 있어.
철덕들한테 욕 엄청 먹는 오송역이 청주에 있고.
일단 대부분 알꺼야.
조선이 만들어지고 전국을 8개 구역으로 나누면서 충청도도 만들어졌어.
충청도의 명칭은 충주와 청주를 스까서 만들었어.
청주를 이야기하려면 충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해.
왜냐면 충주가 뜨면 청주가 지는 그런 관계였거든.
먼저 이 그림을 보자구.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도 경기도 다음으로 경상도에 사람이 많이 살았어.
당연히 과거치러 가는 사람, 장사하러 가는 사람 등등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많은 사람들이 올라갔어.
그들이 가다보면 저 그림 문경 저어디서 큰 산에 막혀.
지금 저 그림에 있는 길은 영남대로야. 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
문경이랑 충주사이가 그 유명한 문경새재. 즉 조령이야.
그리고 충주 있는 곳에서 조금 남쪽으로 가는 길은 영남좌로. 이 길은 추풍령을 넘어가야 해.
그리고 충주 있는 곳에서 쬐끔 윗쪽에 단양이 있는데 거길 넘는건 영남우로. 이 길은 죽령을 넘어가.
이런 이야기 들어봤을꺼야. 과거치러 가는 선비가 죽령을 넘으면 대나무에 탄 것처럼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낙엽처럼 떨어지는데
조령을 넘으면 새가 좋은 소식을 물고와서 새처럼 날아간다고.
그래서 선비들은 조령, 즉 문경새재를 넘었어.
당연히 빠른 길이니까 선비 뿐 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은 문경새재를 넘었고.
문경새재는 대략 1000미터 고개야. 당연히 넘고나면 힘들어.
그러니 좀 쉬어가야지.
바로 쉬는 곳이 충주야.
거기다 충주는 남한강이 있어서 한양까지 뱃길로 이동이 가능해.
사람 모이고 운송로로 좋고. 그러니 물자가 모이고.
당연히 충주는 큰 도시가 되.
이 무렵 청주는 어땠을까??
청주도 충청도의 큰 도시 중 하나였어.
그런데 충주만큼 큰 도시는 아니었어.
추풍령을 넘으면 청주로 들어가는데 메인도로인 영남대로를 끼고 있는 곳도 아니고....뭐 그냥 그랬어.
그러다가 일제시대가 되면서 세상이 변해.
일제때 경부선 철도가 깔려.
아까 말했던 문경새재, 즉 조령과 죽령은 1000미터가 넘는 고개야.
그에 반해 추풍령은 약 400미터.
당시 기술로는 조령 죽령으론 기차가 올라갈 수 없었어. 당연히 추풍령을 넘어가게 되었어.
그리고 추풍령을 넘으면 만나는 도시, 즉 대전이 새롭게 만들어졌어.
옛날엔 그저 한밭, 즉 넓는 밭이라 불리던 동네가 대도시로 탈바꿈한거야.
그리고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청주가 나와.
대부분 도시는 교통로에 따라 운명이 정해져.
예전에 썼던 강경. 수운이 끊기면서 작살이 난 것 처럼.
원래 충청도 행정의 중심이던 충주는 그 역할을 청주에 넘겨. 지금으로 치면 도청이 충주에서 청주로 옮겨진거야.
도청을 옮기면 거기에 딸린 공무원, 식구 등등 얼마나 많은 사람이 움직이겠어.
거기다 도청 산하 기관 등등.
충청도의 무게중심이 움직인거야.
지금의 충북도청이야.
현수막이 걸려있는건 잊어버리고...그냥 봐도 오래된거 같지??
구한말인가 일제땐가 만들어졌어. 대충 100년은 넘은 건물이야.
물론 중간에 보수는 했어.
일제시대 건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대부분 조선총독부나 서울역, 서울시청을 떠올려.
화려하게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
그런데 충북도청같이 모더니즘한 건물은 뭔가 이상하지??
요즘 일본이랑 말이 많은데...
일제식민지시절 조선을 통치하는 일본의 행태는 참 아이러니했어.
유키치가 탈아입구를 외치고 청일전쟁에 이기면서 일본은 아시아의 대장이 되었고 러일전쟁을 이기면서 열강국가가 되었어.
그런데....
막상 열강은 되었는데 이미 어지간한 나라는 유럽이 식민지배를 하는 중이야.
주변을 둘러보니 남은건 한반도랑 중국이네.
일단 조선이랑 대만을 먹었어.
그리고 얘들은 조선이랑 대만을 식민지 모범사례로 만들고 싶어했어.
그러니 서울역이네, 총독부네. 당시 일본이 가진 최고의 기술과 자본을 투자해서 지었어.
또 얼마전에 복원한 미륵사지 석탑. 당시 최고의 기술로 복원을 했어. 지금보니 완전 엉망진창이지만 당시엔 공구리치는게 최고의 기술이었어.
서울, 당시엔 경성이지만 경성은 그렇게 화려하게 꾸몄는데 저 짓을 하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
그래서 지방은 대부분 지금봐도 그냥 그런가 싶은 형태의 건물을 지었어.
식민지 모범사례를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욕하는 내선일체....이게 황당하게도 당시엔 식민지의 모범사례야. 소위 내국인, 즉 일본본토인과 조선인을 동화시키겠다는거.
영국이 식민지였던 인도인에 대해 우리는 하나다 이딴소리 안했거든.
물론 내선일체라고 해도 둘이 평등한 관계는 절대 아니었어.
식민지 시작할 때도 평등하지 않았고 일본이 미쳐돌아간 2차대전때는 더더욱 아니었고.
심지어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 그들을 귀향자라 부르는데 이들도 일본 본토에선 이등국민 취급 받았으니까.
조선땅에서 꿀빨다가 망하니까 돌아왔냐고 욕 엄청 먹었다고 해.
하여간 청주란 도시가 부각되기 시작한건 일제를 지나면서야.
그러면 그 전에는 그냥 뭐 그런 도시였을까??
라고 했을땐 분명히 아니야.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동네야.
우리 여붕이들 한번은 들어봤을 직지심체요절.
현존하는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
그리고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해.
직지가 최고인지는 몰라도 구덴베르크의 금속활자 성경이 세계에 영향을 더욱 크게 미쳤다고.
그렇게 직지의 가치가 구덴베르크 금속활자보다 떨어진다고.
일단 하나하나 알아보자고.
사진 속 책은 아닌데....원본 책의 본래 이름은 직지심체요절 하권이야.
즉 상권이 있다는 소리지. 그런데 아직 못찾았어. 어쩌면 어디 땅 속에 있는지 누가 불쏘시개로 써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리고 이름 뒤에 '요절'이란 단어가 나오지??
요절의 뜻은 중요한 부분을 따로 모았다는 뜻이야.
즉 직지심경이란 경전의 중요한 부분을 따로 모은 책 중 하권이란 뜻이야.
저 책은 청주에 있는 흥덕사란 곳에서 인쇄를 했어.
그리고 굴러굴러굴러 어디로 굴러다니다가 구한말에 프랑스 공사가 길바닥에서 저 책을 구입해. 그리고 프랑스 중앙도서관인가 뭔 도서관에 보냈고.
그렇게 도서관에 짱박혀 있던 고서인데....도서관에서 사서로 있던 박병선박사가 저 책을 발견해.
그리고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했어.
예전에 외규장각문서 프랑스에서 돌려받을때 왜 직지는 안주냐고 난리를 친 적이 있는데...저 책은 영원히 돌려받지 못할꺼야.
왜냐면 훔쳐간게 아니라 돈주고 산거라서. 사정사정해서 임대는 가능할 수 있지만 프랑스놈들이 미쳤다고 빌려주겠어??
다시 위로 올라가서 구덴베르크랑 비교를 했지?? 그리고 그보다 가치가 없다고.
어쩌면 저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해.
mp3플레이어 우리나라 어디였냐?? 어디가 최초로 개발했지만 아이팟이 나오면서 세계를 장악한 것 처럼.
그런데 직지가 가치가 없다고 할 순 없어.
금속활자 이전엔 목판활자를 썼어.
그리고 금속활자는 인간의 창의력이고 지혜의 산물이야.
즉 나무깎아 쓰다가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창의력이 있었고 인류가 진일보 했다는 증거야.
사회적 파급력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히 있어. 그렇지만 그걸 만들어낸 장인의 창의력이나 인류를 진일보시킨 기술에 대해선 무시할 순 없는거야.
여긴 청주사람들의 남한산성과도 같은 상당산성이야.
백제였나 뭐 그때부터 있었다는데 조선시대때 저 형태를 지니게 되었어.
그리고 조선시대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정말 귀한 성 중 하나야.
어디 무슨산성 무슨산성 이런데 가면 바윗덩어리 몇개만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아니면 복원해서 새로 만들었거나.
그런데 상당산성은 과거의 모습 거의 그대로야.
상당이란 이름은 과거의 청주의 호칭이야.
그리고 수양대군, 즉 세조의 쿠데타의 일등공신, 한명회가 상당군으로 봉해져.
상당군의 상당은 청주의 옛이름인 상당이야.
청주가 결코 만만한 도시는 아니었던거지.
또 조선을 뒤흔든 대단한 유학자이자 캐삭빵의 달인인 송시열이 청주랑 인연이 깊어.
바로 이 할배.
보통 유학자 중 대단한 사람을 거유라 부르거든. 니들이 좋아하는 그 뜻이 아니라 거대한 유학자란 뜻이야.
그런데 거유라고 하면 그냥 송시열을 의미하는 경우도 많아. 그정도로 영향력이 컸어.
물론 이 양반이 유학에서 어떤걸 했냐고 하면 나도 잘 몰라.
하여간
원래 충청도 옥천사람인데 현종한테 학을떼고 청주로 내려가.
그리고 거기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중앙정부에 압력을 살살넣어.
그러다가 또 한번 캐삭빵을 했는데.....삭빵당했어.
제주도로 유배갔다가 여기저기 유배돌다가 정읍에서 사약받았어.
송시열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있어. 그래도 어쨌든 조선을 흔든 사람 중 하나였어.
그리고 그의 호는 우암이야. 우암 송시열.
그리고 청주엔 우암동이 있어.
소가 누워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소 우에 바위 암을 써서 우암이라고 한다는데....
누가봐도 음차해서 쓴거 같자너.
이렇게 땅이름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어. 단지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을 뿐이야.
시대는 조선말이야.
우리의 호프 대원군이 전국에 서원들의 문을 닫게 해.
서원훼철령이라고 해.
전국 팔도에 47개만 남기고 다 문을 닫았어.
이게 어떤 의미냐면....
조선은 유교국가야.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유교는 굉장히 현실적인 종교야.
죽어서 극락가자, 천당가자 이딴거 없어.
그냥 공부 열심히해서 벼슬하자. 이게 유교야.
소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하자나.
그리고 그걸 하는 방법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밥먹을때 소리내서 먹지마라, 걸을때 조용히 걸어라 등등.
그러니 굉장히 형식주의적인 모습이 강해.
또 인간은 교육을 통해 유교가 꿈꾸는 이상적인 인간, 즉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해.
위에 말한 형식을 다 갖추고 따라하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해.
심지어 백성들에게도 향약을 만들어서 저 틀에 쑤셔넣으려고 했어.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서 무식한 백성들에게 글눈을 뜨게 했다고 하자나.
그 글눈을 뜨게 한 이유가 저거야.
백성들은 한자 못 외우니까 한글을 만들어서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한거야.
즉 유교는 현실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종교,,,,라기 보다는 학문인거지.
그러니 상복 1년입네 3년입네 이게 지금봤을땐 대충입지, 이렇게 말하지만....
당시 유학자는 형식을 갖춰야 군자가 되는데 왕이 형식을 못갖추면 군자가 안되니까 저걸로 캐삭빵을 했던거야.
물론 지금 눈으로 봐선......
하여간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기초단계로 서당이 있었어.
동네 글 좀 읽는 사람이 애들 모아놓고 공자왈 맹자왈하면서 인간을 만드는거야.
그 인간을 만드는게 군군신신민민. 즉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인거고.
그리고 거기서 공부 좀 더 잘하면 향교를 가.
향교는 쉽게 말해서 국립대학교야.
청주에도
이렇게 향교가 있어.
즉 청주 인근에서 책 좀 본다는 사람은 청주로 모인거지.
그리고 우리의 대원군이 시원하게 밀었던 서원.
서원은 일종에 사립대학이야.
동네 돈 많고 명성있는 어느 양반이 서원을 만들고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을 모셔.
그리고 조선땅에서 가장 많이 모신 사람은 송시열이야.
저 모시는걸 배향한다고 말해.
하여간
청주에는
표충사라는 서원이 살아남았어.
서원 내부는 뭐.....
전국팔도 서원이 생긴게 거기서 거기야.
이봉상이랑 누구 누구 해서 세사람을 배향해.
원래 서원은 한명 아니면 세명을 배향해. 네명을 배향하는 곳은 전국팔도에 호계서원 한 곳 뿐이야.
즉 향교가 있으면 나라에서 지정한 제법 큰 동네란 뜻이고
서원이 있으면 그 동네는 돈 좀 있는 사람도 있었고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정년해서 내려온 양반이 있었다는 의미야.
조선시대 청주가 그냥 따까리 도시가 아니라는 의미지.
그리고 서원을 문닫게 할 때 닫지않은 서원이 있다는건 그만큼 도시나 그 도시에 있는 유림들의 영향력이 컸다는거고.
땅에 남아있는 흔적을 통해서 도시의 역사와 의미를 유추할 수 있어.
청주는 꽤나 힘쓰는 도시였다는걸.
이건 청주시내에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이야.
그리고 국보 몇호로 지정되어 있어.
그리고 여기 옆은 흡연구역이고.
이 철기둥은 뭐하는거냐면.....
이 동네는 원래 용두사라는 절이 있었어.
그리고 절에 행사가 있으면 저 기둥에 부처님이 그려진 탱화를 걸었던거야.
보통 절에 가면 철기둥옆에 있는 돌만 보여.
그런데 여긴 철기둥이 있다는거 자체가 대단한거고.
그거보다 더 대단한건
사진처럼 철당간에 기록이 되어있다는거야.
대충 내용은 누가 이걸 왜 만들었고 어쩌고 저쩌고 그런 내용이야.
그리고 또 하나가
저기에 준풍삼년이라고 적혀있어. 만들어진 시기가.
준풍이란건 고려때 우리도 황제할란다 하면서 독자연호를 쓰거든. 그 연호가 준풍이야.
즉 고려때 만들어진게 확실하다는거지.
그리고 잘 보면 원통을 이어서 만든게 보일껀데....저기 기록엔 30개를 이었다는데 지금은 20개뿐에 없어.
누구는 대원군이 경복궁만들면서 10개 뜯어갔다고 하는데....아무도 본 사람도 없고 기록도 없어.
하여간 무언가 기록이 되어있다는건 무조건 가치가 높아.
그림도 낙관이 찍혀있으면 가치가 높아지고 글씨도 그렇고.
도자기도 밑에 어디서 만들었다고 써있으면 가치가 높아져.
가치란게 돈이 비싸다는게 아니라 그 출처나 그런걸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거야.
그리고 저 철제당간은 우리나라에선 유일하게 기록이 있어.
거기다 고려때 독자연호가 쓰여져있으니 더 그렇지.
뭔가 더 있었던거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잠도 오고 더 쓰기도 귀찮고 그렇네.
저 철당간을 봤을때 그냥 굴뚝인가?? 이렇게 넘어갈 수도 있어.
그런데 고려가 자주국가가 되겠다는 증거물이었어.
그리고 향교와 서원, 우암동과 상당산성을 보면서 조선 유교의 흔적을 볼 수 있어.
또 충북도청을 보면서 일제를 볼 수 있어.
하여간 역사란 놈은 늘 숨어있어.
그런데 그 놈은 늘 흔적을 남겨.
지명에서 남기고 유적으로 남기고 이야기로도 남겨.
그 흔적을 찾으러 가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어.
그러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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